• 국문초록
대한제국 후기에 활동한 신민회는 한국 근대민족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음에도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전모가 베일에 싸여 있다. 특히 결성 시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엇갈리지만 이에 대해 본격적인 검토와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논문은 통설로 여겨지는 ‘1907년 4월 결성’ 說이 근거가 매우 취약함을 지적했다. 그리고 신민회 결성을 주도한 안창호와 그 과정을 지켜본 최측근 이강의 증언을 면밀하게 검토하여 신민회가 1908년 초에 만들어졌음을 드러냈다.
신민회가 1907년 2월 안창호가 관련 문건을 갖고 귀국한 이후에도 1년이 지나서야 결성된 것은 그와 국내 민족운동가들의 정치의식이 차이가 났기 때문이었다. 안창호와 그의 배후세력인 미주 공립협회가 한국의 維新을 주장하며 국민주권론을 내세운 것과 달리 국내 민족운동가들은 입헌군주제를 통한 군주권의 제한을 지향했다. 이런 간극이 1907년 7월 고종이 강제양위된 뒤에 좁혀지고 나서 신민회 결성이 본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이 논문은 또 안창호의 귀국 이전인 1906년 무렵에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한 상동파가 먼저 신민회를 결성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 조직과 신민회의 성격이 달랐음을 밝혔다. 상동파가 만든 조직은 전통적인 애국 사상에 기반을 둔 救國 운동 단체였던데 비해 신민회는 한국 사회의 유신을 지향하는 개혁 운동 단체의 성격이 강했다.
주제어 : 신민회, 안창호, 維新, 국민주권, 상동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