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향신문 2023.09.13]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그동안 감사했어요
2023-09-21경향신문 2023년 9월 13일에 실린 기사 발췌 출처: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9132013015 2024년 정부 예산안에 따르면 과학기술 분야의 R&D 예산이 16.6% 줄어들게 된다. 산업 발전에 즉각적인 도움을 주기 어려운 순수기초과학 분야의 연구는 거의 대부분 기업이 아닌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다. 예산 삭감으로 가장 먼저 큰 타격을 받을 분야가 기초과학이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기초과학 분야 연구자가 연구계획서를 한국연구재단에 제출하면, 계획서의 내용을 심사할 같은 분야의 전문 연구자들이 심사자로 선정된다. 힉스 입자 이론 연구를 하겠다는 과제를 나와 같은 통계물리학 연구자가 제대로 심사할 수는 없다. 결국 통계물리학 분야 연구과제는 주로 통계물리학자가, 입자물리학 분야 연구과제는 주로 입자물리학자가 심사한다. 아니길 바라지만, 요즘엔 이런 것도 카르텔이라 부를지도 모르겠다. 심사자들은 계획서를 익명으로 평가해 지원 대상 과제 선정에 도움을 준다. 지원 대상 과제로 선정되면 매년 연구비가 소속 대학에 입금되고, 미리 제출한 예산안에 따라 증빙 서류를 갖춰 연구비가 집행된다. 접수된 연구과제 중 얼마나 많은 과제가 선정되었는지, 그 비율을 과제 선정률이라 한다. 올해 과제 선정률은 이전보다 줄었다. 2023년 예산이 2022년 수준과 비슷하다는 게 알려졌을 때 예상한 일이다. 과거 한동안 늘어난 예산으로 신규과제 선정이 많았고, 이들 과제들은 앞으로도 몇년 예산이 계속 투입되므로 신규로 선정할 수 있는 과제 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예산이 동결되어도 한동안 신규과제 선정률이 낮아지니, 예산이 대폭 삭감되면 내년 선정률은 더 줄어든다. 게다가 탈락한 연구자가 이후 다시 지원하므로, 지원자 숫자는 누적적으로 늘어나 선정률은 더욱 낮아지게 된다. 2024년 과제 선정률은 올해보다도 훨씬 더 낮아질 게 분명하다. 만약 과제 선정률이 5~10% 정도라면, 연구를 하고자 하는 연구자 10~20명 중 1명만 연구비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교수의 삶을 시작한 이래로 20여년, 국가에서 지원하는 연구비를 못 받은 적은 없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컴퓨터 말고는 실험 장비가 딱히 필요 없는 이론물리학 분야에서 연구비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대학원생 인건비다. 국민이 주시는 소중한 돈이다. 정부 연구비에서 교수는 자신의 인건비를 어차피 지급받지 않으므로, 과제를 수주하지 못한 교수에게 학문적 타격은 있어도 경제적 타격은 없다. 대학원생은 다르다. 교수가 연구과제를 수주하지 못하면 대학원생의 생계가 어려워진다. 최소한 내가 속한 분야에 카르텔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백번 양보해 내가 모르는 카르텔이 있다 해도, 연구비 대폭 삭감으로 발생하는 피해는 정부에서 지목하는 카르텔 교수가 아니라 카르텔과 상관없는 대학원생에게 집중된다. 게다가 부모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대학원생이 첫 번째 피해자가 된다. 현재 지원받고 있는 과제는 내년 초에 종결된다. 요즘 고민이 많다. 나보다 의욕적이고 혁신적인 젊은 교수의 연구과제가 지원받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닐지, 그렇다면 이제 연구를 그만둘 시점이 마침내 내게 온 것이 아닐까 매일 고민한다. 연구비 수주의 전망이 어두워,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이었던 학생에게는 다른 그룹으로 진학하는 것이 좋겠다고 알렸다. 교수들은 대학원생 받는 것을 이미 주저하기 시작했고, 정부 출연 연구소에서도 내년 비정규직 연구원 채용 규모를 이미 줄이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예산 삭감의 피해는 대학원 진학을 꿈꾸던 학부생, 현 대학원생, 그리고 비정규직 연구원에게 집중된다. 연구비 삭감으로 과학자를 꿈꾸는 젊은 연구자가 줄어들면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에 큰 장애가 생기고 결국 큰 피해는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 국민 모두에게 돌아올 게 분명하다. “계속 과학을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큰 욕심도 없이 과학을 그냥 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이 계속 그 길을 걷도록 도와주는 것이 정말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일일까? 그동안 연구를 재밌게 하면서 정말 행복했고, 하루하루 발전하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큰 보람도 느꼈다. 딱히 세상에 어떤 경제적 도움이 될지 알 수 없고, 노벨상을 받을 리도 없는 부끄러운 연구를 20여년 지원해 주신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린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경향신문 2023.08.16]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과학은 또 이렇게 한 걸음을 이어간다
2023-08-22경향신문 2023년 8월 16일에 실린 기사 발췌 출처: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8162016015 상온상압 초전도체 주장이 최근 큰 관심을 끌었다. 여러 그룹에서 시료를 제작해 실험하기도 했다. 현재 초전도체가 아닌 것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과학자로 살다보면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놀라운 결과가 큰 관심을 끌면, 여러 연구그룹이 재현실험을 시도하고, 설명하는 이론을 제안하기도 한다. 전에 들은 농담이다. 이론물리학자는 자기 이론만 믿고, 실험물리학자는 심지어 자기 실험도 믿지 않는다는 농담이다. 농담이지만 학계에 만연한 건강한 회의(懷疑)의 풍토를 어느 정도 담고 있다. 과학자는 늘 의심하는 것이 뼛속 깊이 자리 잡은 사람들이다. 긴 세월 회의와 검증의 시간을 꿋꿋이 견딘 것들이 모여 과학의 토대가 되고, 튼튼한 바닥이 최근의 논문을 의심하는 근거로 작동한다. 방금 출판된 결과를 진실이라 믿는 과학자는 거의 없어서, “재밌군.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겠어” 정도로 받아들인다. 검토와 회의, 비판과 재현의 과정이 이어지면서, 처음 결과가 굳건한 사실로 학계에 받아들여져 토대에 편입되기도 하고, 회의의 체에 걸러져 과학의 뒤안길로 사라지기도 한다. 튼튼한 과학의 나무는 회의를 양분 삼아 조금씩 천천히 자란다. 과학자도 사람이어서 실수할 수 있다. 하지만 충실하고 솔직하게 결과를 보고했다면, 딱히 책임을 묻지는 않는다. 물론, 고의로 결과를 조작하거나 하지 않은 실험을 한 것처럼 속인 논문은 다른 문제다. 학계의 신뢰를 크게 잃어 이 연구자의 이후 연구는 학계의 주목을 받기 어려워져, 학계에서 방출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이처럼 작동하는 자정의 힘은 상당히 크다. 누가 면밀히 조사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도 대부분 과학자는 논문에 거짓을 담지 않아서, 다른 이의 논문을 일단 믿고 보는 것이 가능한 문화가 정착되었다. 고의적인 조작은 상호신뢰의 관행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나쁜 부정행위다. “다들 일단 믿어줄 테니 데이터를 좀 바꾼들 누가 알까”의 마음이 학계에 널리 퍼지게 되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아무도 믿지 못하면 과학은 없다. 연구결과는 주로 동료 평가를 거친 논문으로 공개된다. 논문이 투고되면 학술지 편집자는 같은 분야의 과학자를 두세 명 선정해 심사를 맡긴다. 트집 잡을 것이 없어 출판이 단박에 결정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익명의 심사자와 논문 투고자 사이에 비평과 답변이 오가며 논의가 보강되고 결과가 충실해지는 과정을 거친다. 심사를 통과해 출판되었다고 해서, 모든 과학자가 논문의 내용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정식 출판된 논문 중에도 가치가 없는 것이 많고, 후속 연구로 논문이 틀린 것으로 밝혀지는 일도 제법 발생한다. 심사를 거쳐 출판되었다는 것은, 논문이 학계에 공개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을 만족했다는 정도의 의미다. 연구의 가치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이후에 이루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학회와 논문에서 자주 언급하고 인용하며, 논문에 기대어 많은 후속연구가 이어지면서, 같은 분야의 연구자들 사이에는 중요한 논문과 훌륭한 연구자에 대한 암묵적인 합의가 형성된다. 논문이 출판되기까지는 짧아도 몇달 정도가 걸린다. 공개 시점을 훌쩍 앞당기는 방법이 있다. 바로, 이번의 초전도 논문 같은 경우다. 동료 평가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볼 수 있게 출판 전 온라인에 공개되는 논문을 프리프린트(preprint)라고 한다. 물리학 분야의 프리프린트는 주로 아카이브(arXiv)에 공개된다. 출판 이후에 논문을 아카이브에 올리는 학자도, 논문을 전혀 올리지 않는 학자도 많다. 또, 투고 전 학계의 반응을 미리 살펴 정식 투고 논문을 더 충실하게 하기 위해 프리프린트를 미리 공개하는 학자도 많다. 완결된 것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마무리된 결과를 모아 프리프린트를 아카이브에 올리는 것은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이번 상온상압 초전도 프리프린트도, 다른 저자의 동의 등 다른 문제가 없다면, 아카이브에 먼저 공개한 것을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완성도가 아쉽다는 의견도 있지만, 아카이브는 원래 그런 논문도 올릴 수 있는 곳이다. 물론, 대다수 연구자는 프리프린트에도 정성을 기울인다. 엉성한 논문을 섣불리 공개하면 본인의 평판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의 프리프린트는 완성도의 문제도 있지만, 초전도체라면 꼭 보여야 하는 특성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의견으로 보인다. 어떻게 결론이 나든, 과학은 또 이렇게 한 걸음을 이어간다.
[경향신문 2023.07.20]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다양한 자연현상, 동일한 자연법칙서 비롯한다
2023-08-03경향신문 2023년 7월 20일에 실린 기사 발췌 출처: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7200300015 “딱 하나로 정해진 중력법칙을 따라 행성 지구가 태양 주위를 오랜 시간 공전하는 동안, 정말 단순한 시작에서부터 이토록 아름답고 경이로운 온갖 다양한 형태의 생명이 진화했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다윈의 <종의 기원>에는 이렇게 내가 옮겨 본 유명한 마지막 부분이 있다. 어쩔 수 없는 물리학자인 나는, 고정된 중력법칙과 생명의 다양성이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다윈의 통찰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현상의 다양성은 자연법칙의 단순한 동일성과 함께한다. 같아도 다를 수 있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같지만 다른 예가 많다. 풀잎 위 빗방울은 둥근 구슬로 구르고, 쏟은 물은 바닥에 넓게 퍼진다. 크고 작은 물 덩이의 다른 모습은 물리학의 에너지가 정한다. 작은 빗방울의 모습은 중력이 아닌 전기력이 정한다. 표면적이 작을수록 에너지가 더 낮아 빗방울은 둥글게 뭉쳐 구른다. 커다란 물 덩이의 모습은 전기력이 아닌 중력이 정한다. 지면에 가까울수록 에너지가 더 낮아 쏟은 물은 납작 엎드려 바닥에 퍼진다. 정확히 같은 전기력, 정확히 같은 중력이 작용해도 물 덩이의 크기에 따라 다른 모습이 된다. 똑같은 물리학이 물 덩이의 다른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똑같은 진화의 법칙이 작용해도 실로 다양한 생명이 만들어진다. 다양한 자연현상이 동일한 자연법칙에서 비롯한다. 생물학의 유전적 부동의 부동(浮動)은 부동산의 부동(不動)이 아니다. 시냇물 위 나뭇잎이 둥둥 떠(浮) 휘휘 움직이는(動) 것처럼, 집단 내 유전자의 빈도가 변하는 것이 유전적 부동이다. 생존에 유리한 형질을 표현하는 유전자가 선택되는 것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다. 유전적 부동은 다르다. 생존 가능성에 차이가 없어도 유전자 빈도의 시간 변화를 만들어낸다. 흰 돌, 검은 돌, 색깔만 다른 바둑알이 각각 10개씩 담긴 주머니를 생각해보자. 바둑알 하나를 마구잡이로 꺼내, 같은 색 하나를 보태 두 개를 다른 빈 주머니에 넣자. 이 과정을 10번 반복해 바둑알 20개가 담긴 두 번째 주머니를 채우자. 이를 또 여러 번 되풀이해 세 번째, 네 번째 주머니로 이어가보자. 마지막 주머니의 속사정은 어떨까? 눈 질끈 감고 하나를 꺼내 같은 색 둘을 다음 주머니에 담는 과정은, 우연에 의해 선택된 개체가 다음 세대에 두 개체의 자식을 낳는 과정에 해당한다. 이때, 희고 검은 색에는 생존과 생식 확률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어쩌다 우연히 주머니에서 흰 바둑알이 검은 바둑알보다 손에 몇 번 더 잡혔다면, 다음 세대 주머니에는 흰 바둑알이 더 많아진다. 최종 주머니에는 흰색만 가득 들어 있을 수도 있다. 색에 따른 생존 확률의 차이가 없어도, 유전적 부동이 집단 내 유전자 빈도의 시간 변화로 이어져 진화를 만들어낸 셈이다. 자연선택은 다르다. 아무 바둑알 하나를 눈 질끈 감고 고르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만약 흰색이면 바둑알 하나만, 검은색이면 두 개를 두 번째 주머니에 담는 실험을 생각해보자. 여러 번 이어가면, 결국 검은색 바둑알만 가득한 주머니가 등장한다. 희고 검은 차이에 따라 자손의 개체 수가 달라지는 자연선택의 원리다. 자연선택과 유전적 부동은 집단 내 유전자의 빈도 변화를 마찬가지로 만들어내지만, 유전적 부동은 표현형의 차이에 눈감는 중립선택이다. 유전적 부동이 생물 종을 멸종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어쩌다 등장한 흰색만 담긴 주머니가 검은색만 생존할 수 있는 새로운 환경에 놓이는 경우다. 이때 다음 세대는 바둑알이 멸종해 텅텅 빈 주머니가 된다. 유전적 부동은 집단의 크기가 작을 때 강해진다. 바둑알 100만개로 같은 실험을 진행하면, 한 색깔이 주머니를 가득 채우는 상황을 보기 어렵다. 같은 것을 다르게 보는 물리학자의 눈에, 유전적 부동은 크기가 작을 때 드러나는 물리학의 유한 크기 효과(finite-size effect)다. 또, 한 색깔이 주머니를 가득 채우면 이후에는 아무런 변화 없이 같은 속사정을 가진 주머니가 계속 이어지는 생물학의 유전적 고정(genetic fixation)은, 한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는 통계물리학의 흡수상태(absorbing state)다. 유전적 부동이 일으키는 유전적 고정을 생물학이 말할 때, 물리학은 유한 크기 효과가 일으키는 흡수상태를 본다. 물리학과 생물학은 같은 자연을 바라보는 결 다른 시선이다. 같아도 다르고, 달라도 같은 것이 자연과 과학의 참모습이 아닐까.
[경향신문 2023.06.22]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로또, 투자가 아닌 단순 확률게임
2023-06-26경향신문 2023년 6월 22일에 실린 기사 발췌 출처: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6220300015 우리나라 로또는 45개의 숫자 중 6개를 맞힌 사람이 1등에 당첨되는 방식이다. 지난주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은 모두 12명이었고 각자 22억원의 상금을 받게 되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정말 부럽다. 로또 한 장을 사면서 우리는 희망도 함께 산다. 당첨되면 부모님께 아파트를 사드릴지, 차를 바꿀지, 행복한 고민을 며칠 이어 할 수 있다. 그렇다면, 1등 당첨확률은 얼마나 될까?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1등 당첨확률을 알려면 전체 가능한 가짓수를 계산해야 한다. 먼저, 첫 번째 숫자에는 모두 45개의 가짓수가 있다. 앞에 나온 숫자가 다시 나올 수는 없어서 두 번째에는 44개의 가짓수, 세 번째에는 43개의 가짓수가 있다. 이 가짓수를 차례로 여섯 번 곱한 45×44×43×42×41×40을 계산하면 60억 정도가 된다. 6개 번호의 순서가 뒤바뀌어도 여전히 당첨번호라는 것을 고려해 이 값을 보정하면, 로또 1등 당첨확률은 약 800만분의 1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매주 1억장 이상의 로또가 판매되니 지난주 1등 당첨자 수 12명은 예상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당첨확률이 아무리 작아도 많이 팔리면 누군가가 당첨된다. 그 누군가가 내가 될 가능성이 거의 없을 뿐이다. 당첨을 크게 기대하지 마시라. 지금까지의 당첨번호를 모아서 살펴보면 어떤 번호가 다른 번호보다 더 자주, 혹은 더 드물게 관찰된다. 하지만 더 자주 나왔던 번호라고 해서 다음주에 당첨될 확률이 더 높은 것은 아니다. 번호별 당첨횟수의 차이를 통계학의 방법으로 살펴보니, 6개 번호가 독립적으로 마구잡이로 결정된다는 가설을 기각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결과가 얻어졌다. 당첨번호 예측은 불가능하다. 정말로 당첨번호를 높은 확률로 미리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분이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어 유료 회원을 모집할지, 아니면 자신이 예상한 번호로 로또를 단돈 1000원에 구매해 수십억원을 벌지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이런 사이트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당첨번호는 무작위로 정해져도 1등 당첨자 수는 큰 폭으로 변할 수 있다. 자기가 원하는 숫자 6개를 직접 골라 적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1, 2, 3, 4, 5, 6을 손으로 직접 적어낸 구매자가 1만명이어서 지난주 당첨번호인 16, 18, 20, 23, 32, 43을 적어낸 구매자 12명보다 훨씬 더 많다면 어떨까? 두 경우 모두 정확히 같은 800만분의 1정도의 확률로 1등에 당첨되지만, 정말로 다음주에 1, 2, 3, 4, 5, 6이 당첨되면 1등 당첨자는 기껏해야 300만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금을 받게 된다. 실제로 이렇게 6개의 번호를 순서대로 적거나, 용지의 세로 방향으로 나란히 6개의 숫자를 적어내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다음에 로또를 구매할 때는 사람들이 고르지 않을 것 같은 번호를 고르거나, 어떤 번호를 고를지 고민이라면 무작위로 자동 생성하는 것이 더 낫다. 당첨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당첨될 때 받게 되는 상금의 측면에서는 그나마 나은 방법이다. 1등 당첨이 많이 나온다는 로또 명당 판매점도 허상이다. 1등 당첨자가 어쩌다 여러 번 나온 판매점이 있으면, 이후에는 명당으로 소문이 나서 더 많은 로또가 팔리고, 결국 다음에 또 당첨자가 나올 확률이 더 커진다. 소문일 뿐이어도 정말로 로또 명당이 된다. 하지만 굳이 그곳에서 로또를 산다고 해서 내가 산 로또가 당첨될 확률이 큰 것은 아니다. 아무 판매점에서나 로또를 구매해도 내가 1등에 당첨될 확률은 어디서나 같다. 로또는 투자가 아니라는 것을 꼭 강조하고 싶다. 10년 동안 매주 로또를 여러 장 구매한 사람이든, 오늘 로또 한 장을 처음 구매한 사람이든, 이번주 1등 당첨확률은 정확히 같다. 로또는 투자가 아니며, 매번 독립적으로 6개의 번호가 마구잡이로 결정되는 단순한 확률게임이다.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들을 살핀 연구에 따르면 당첨의 행복감은 2년을 넘지 못한다. 오히려 갑자기 큰돈이 생기면, 그로 인해 바뀐 소득 기준의 상향 변화로 당첨 이후에는 평범한 한 달 월급이 하찮게 느껴지게 된다. 웬만한 수입에는 행복감을 느끼기 어려워지게 된다. 부담이 될 정도로 큰돈을 로또 구매에 쓰지는 마시라. 로또 한 장을 살 때 우리가 구매하는 것은, 수십억원을 기대하며 누리는 며칠 동안의 소소한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