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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 [경향신문 2023.11.08]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기후위기와 인류의 미래
- 경향신문 2023년 11월 8일에 실린 기사 발췌 출처: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11082023015 지난 11월2일 우리나라 전역의 날씨는 마치 초여름 같았다. 무려 30도에 가까운 낮 기온을 보여준 곳도 있었고, 그날 하루 중 최저 기온이 1907년 시작된 우리나라 기상 관측 116년 역사에서 가장 높았던 곳도 여럿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다. 올해 전 세계 곳곳에서는 이상 고온, 홍수, 그리고 대규모 산불 등의 자연 재해가 그치지 않았다. 기온이 상승하면 숲의 나무가 머금고 있는 액체 상태의 물은 기체인 수증기로 변해 나무에서 대기로 옮겨간다. 해가 떠 온도가 높아진 한낮에 아침 이슬과 안개가 사라지는 것과 정확히 같은 원리다. 결국 대기의 기온이 높아지면 숲이 건조해져 산불 규모가 커진다. 기온 상승으로 대기가 더 많은 수증기를 머금으면, 당연히 강수량이 늘어 홍수 피해가 커지고, 당연히 에너지가 커져 태풍 피해도 커진다. 태풍, 홍수, 산불의 규모는 지구의 기온 상승과 함께 커진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명백한 과학적 사실이다. 10월23일 뉴욕타임스에 실린 기후과학자 하우스파더(Z Hausfather)의 글에는 1850년대 이후 매년 바다의 월평균 온도 변화의 추이를 보여주는 그래프도 담겨 있었다. 올해 9월 평균 온도는 산업화 이전과 비교해 1.8도 더 높았다. 작년까지의 신기록이었던 1.3도가 1년 만에 1.8도로 훌쩍 높아졌다. 올해는 과거 2000년의 기간 중 가장 뜨거운 해로 기억될 것이 확실하다. 더 큰 걱정이 있다. 최근 15년 정도 안에 일어난 기온 상승은 그 이전보다 더 가파르게 일어나고 있다. 여러 기후학자가 마지노선으로 합의한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평균 기온 1.5도 상승은 이제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하루 안에도 10도 정도 오르내리는 매일의 기온과 비교하면 1.8도가 큰 값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람이 많다. <기후를 위한 경제학>의 저자 김병권은 강연에서 지구의 평균 기온을 우리 몸의 체온에 비교해 볼 것을 권했다. 체온이 몇 도만 올라도 우리는 해열제를 먹고 응급실로 간다. 지구 평균 기온도 마찬가지여서 몇 도만 올라도 회복이 어려운 피해가 생길 수 있다. 게다가, 감기에 걸린 사람 체온은 며칠 뒤면 내려가지만, 현재 지구의 높은 체온은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기온 상승을 늦추거나 되돌리는, 해열제 복용에 해당하는 기후 위기 대응 노력이 턱도 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구의 기온은 앞으로 한동안은 계속 높아질 것이 확실하다. 지금은 명백한 기후 위기의 시대다. 지구가 지금 심한 몸살감기를 앓는다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 지구는 무탈하다. 오랜 지질학적 규모의 시간에서 지금보다 기온이 높았던 때도, 대기에 산소가 없던 때도 있었다. 현재의 기온 상승으로 심각한 위기에 맞닥뜨린 것은 지구가 아니라 인간이다. 보이저 1호가 촬영한 사진 ‘창백한 푸른 점’을 떠올린다. 우주를 떠다니는 예쁜 우주선 ‘창백한 푸른 점’호의 좁은 내부 공간을 우리는 그간 무한한 크기로 여겼다. 얼마든지 가져다 쓸 수 있는 무한한 자원이 저 작은 점 안에 있으며, 우리가 무얼 해도 이 작은 우주선이 아무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 여겼다. 지구의 기온을 올린 것도 우리고, 현재 생존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도 우리 인간이다. 기후 변화의 이해는 과학의 문제지만,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것은 결국 사회와 정치의 문제다. 기후 위기의 시대를 맞아, 우리가 바라는 미래를 상상해 현실에 구현하는 것은 결국 우리 인간의 노력에 달렸다. 아무리 작은 숫자여도 일정한 경제 성장률이 앞으로 계속 이어지면 경제 규모는 무한대를 향해 발산한다. 하지만, 유한한 작은 지구에서 인구가 무한히 늘 수도 없고, 우리 인간이 무한히 많은 양을 소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너무나도 자명한 수학적 결론이다. 그렇다면, 경제 성장이 없어도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우리가 생존을 이어갈 수 있는 먼 미래의 유일한 모습이다. 산업혁명 전의 과거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아니다. 앞으로도 생산성은 끊임없이 증가하겠지만, 줄어들 총 노동의 양을 1인당 노동 시간을 줄여 해결하면 일자리가 줄어들 필요도 없다. 걱정스러운 기후 위기의 시대에 나는 거꾸로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 1인당 노동 시간이 0으로 수렴하는 미래, 하루만 일하고 364일은 책 보고, 영화 보고, 가족과 산책하는 먼 미래를 꿈꾼다. 얼마나 버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행복한지가 경쟁의 잣대가 되는 미래를 꿈꾼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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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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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2023.10.11]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새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
- 경향신문 2023년 10월 11일에 실린 기사 발췌 출처: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10112048035 어린 시절 제비는 흔히 볼 수 있는 새였다. 친구들과 골목에서 놀다 보면 제비가 낮게 날 때가 있었다. 비가 올지 모르니 빨리 집에 가라는 동네 어른 말씀에 뜀박질을 시작하면 정말로 곧 소나기가 쏟아지고는 했다. 새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는 것은 오랫동안 누적된 경험으로 우리 선조가 파악한 상관관계다. 하지만 새가 낮게 날기 ‘때문에’ 비가 오는 것은 아니다. 상관관계가 사실이라고 해서 하나가 다른 하나의 원인인 인과관계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한 나라의 노벨상 수상자 숫자와 초콜릿 소비량 사이에 상당히 강한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그래프를 본 적이 있다. 물론 이것도 인과관계는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아직 없는 이유가 한국인이 초콜릿을 적게 먹기 때문일 리는 없다. 새가 낮게 날아 비가 온 것도 아니고, 초콜릿 많이 먹어 노벨상 타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관관계 자체가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명확히 관찰된 상관관계의 배후에는 이를 만들어내는 합리적인 근거를 찾을 수 있을 때가 많다. 우리 눈에 투명해 보여도 지구의 대기 안에는 수많은 기체 분자가 있다. 이들 기체 분자들도 질량이 있어 손에서 놓은 돌멩이처럼 지구 중심 방향으로 중력을 받는다. 기체분자들은 마치 양파 껍질처럼 둥근 지구를 둘러싸 켜켜이 쌓이고, 대기의 압력은 지면으로부터 위로 오를수록 줄어든다. 한편 지구의 기상현상으로 한 지역의 대기압이 주변 지역의 대기압보다 낮을 수 있다. 주변의 사방에서 지면을 따라 수평방향으로 저기압 지역으로 유입된 공기는 옆 방향으로는 어디 갈 데가 없으니 지면의 수직방향으로 위로 솟아오른다. 저기압 지역에서는 기압이 낮다는 바로 그 이유로 대기가 위로 상승하고, 위로 오르면서 대기의 온도가 낮아진다. 온도가 낮아지는 새벽에 이슬방울이 맺히고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과 같은 이유로, 상승하며 온도가 낮아진 대기는 머금을 수 있는 수증기의 양이 줄어 액체상태의 작은 물방울들이 형성된다. 고기압이 아닌 저기압 지역의 상공에 비구름이 형성되는 이유다. 결국 저기압지역에서 강수 확률이 더 높다. 달에서는 드론을 날리지 못하지만 화성에서는 가능하다. 하지만 지구에서 잘 나는 드론도 화성에서는 잘 날지 못한다. 지구, 화성, 달에서 드론이 다르게 나는 이유는 대기의 압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기가 없는 달에서는 드론을 띄울 수 없고, 화성에서는 중력이 지구보다 작지만 대기가 무척 희박해 날개의 회전속도가 상당히 빨라야 드론이 난다. 헬리콥터형 화성탐사 드론인 인제뉴어티의 날개 회전속도가 무려 분당 2400번인 이유다. 곤충과 새도 하늘을 비행하기 위해서 공기를 이용한다. 드론이 화성에서 날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유로, 곤충과 새도 저기압에서는 날기 어려워진다. 결국, 저기압 지역의 곤충과 새는 가능한 지면 근처에서 날게 된다. 높은 곳으로 오르면 안 그래도 낮은 기압이 더 낮아져 나는 것이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결국 한 지역이 저기압이 되면 그곳에서는 곤충과 새들이 낮게 날고, 그곳에서 비구름도 더 쉽게 형성된다. 저기압과 새의 저공비행, 저기압과 높은 강수확률은 각각 짝을 지어 인과관계로 연결되고, 새의 저공비행과 높은 강수확률은 저기압을 매개로 해서 강한 상관관계를 보이게 된다. 새의 저공비행이 비를 내리는 원인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새를 줄에 매달아 억지로 높이 날지 못하게 해 비를 내릴 수는 없다. 노벨상 수상자 수와 초콜릿 소비량 사이의 상관관계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경제수준이 높은 나라가 아무래도 기초과학 발전에 더 큰 예산 지원을 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하고, 초콜릿처럼 안 먹어도 그만인 기호 식품의 소비도 그 나라의 경제수준과 양의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 결국, 초콜릿 많이 먹어서 노벨상을 타는 것은 아니지만, 둘 사이의 강한 상관관계를 경제 발전 수준을 매개로 해서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새가 낮게 날면 비가 오지만, 초콜릿 많이 먹는 과학자가 노벨상 타는 것은 아니다. 초콜릿 소비 진작보다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훨씬 더 나은 방법이 있다. 바로, 기초과학에 대한 충분한 지원이다. 기초과학에 대한 긴 안목의 장기적 지원이 줄어들면 노벨상 수상이 더 어려워진다는 것은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는 명확한 인과관계다. 지원이 줄면 미래의 과학자가 줄고, 과학자가 사라지면 과학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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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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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2023.09.13]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그동안 감사했어요
- 경향신문 2023년 9월 13일에 실린 기사 발췌 출처: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9132013015 2024년 정부 예산안에 따르면 과학기술 분야의 R&D 예산이 16.6% 줄어들게 된다. 산업 발전에 즉각적인 도움을 주기 어려운 순수기초과학 분야의 연구는 거의 대부분 기업이 아닌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다. 예산 삭감으로 가장 먼저 큰 타격을 받을 분야가 기초과학이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기초과학 분야 연구자가 연구계획서를 한국연구재단에 제출하면, 계획서의 내용을 심사할 같은 분야의 전문 연구자들이 심사자로 선정된다. 힉스 입자 이론 연구를 하겠다는 과제를 나와 같은 통계물리학 연구자가 제대로 심사할 수는 없다. 결국 통계물리학 분야 연구과제는 주로 통계물리학자가, 입자물리학 분야 연구과제는 주로 입자물리학자가 심사한다. 아니길 바라지만, 요즘엔 이런 것도 카르텔이라 부를지도 모르겠다. 심사자들은 계획서를 익명으로 평가해 지원 대상 과제 선정에 도움을 준다. 지원 대상 과제로 선정되면 매년 연구비가 소속 대학에 입금되고, 미리 제출한 예산안에 따라 증빙 서류를 갖춰 연구비가 집행된다. 접수된 연구과제 중 얼마나 많은 과제가 선정되었는지, 그 비율을 과제 선정률이라 한다. 올해 과제 선정률은 이전보다 줄었다. 2023년 예산이 2022년 수준과 비슷하다는 게 알려졌을 때 예상한 일이다. 과거 한동안 늘어난 예산으로 신규과제 선정이 많았고, 이들 과제들은 앞으로도 몇년 예산이 계속 투입되므로 신규로 선정할 수 있는 과제 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예산이 동결되어도 한동안 신규과제 선정률이 낮아지니, 예산이 대폭 삭감되면 내년 선정률은 더 줄어든다. 게다가 탈락한 연구자가 이후 다시 지원하므로, 지원자 숫자는 누적적으로 늘어나 선정률은 더욱 낮아지게 된다. 2024년 과제 선정률은 올해보다도 훨씬 더 낮아질 게 분명하다. 만약 과제 선정률이 5~10% 정도라면, 연구를 하고자 하는 연구자 10~20명 중 1명만 연구비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교수의 삶을 시작한 이래로 20여년, 국가에서 지원하는 연구비를 못 받은 적은 없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컴퓨터 말고는 실험 장비가 딱히 필요 없는 이론물리학 분야에서 연구비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대학원생 인건비다. 국민이 주시는 소중한 돈이다. 정부 연구비에서 교수는 자신의 인건비를 어차피 지급받지 않으므로, 과제를 수주하지 못한 교수에게 학문적 타격은 있어도 경제적 타격은 없다. 대학원생은 다르다. 교수가 연구과제를 수주하지 못하면 대학원생의 생계가 어려워진다. 최소한 내가 속한 분야에 카르텔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백번 양보해 내가 모르는 카르텔이 있다 해도, 연구비 대폭 삭감으로 발생하는 피해는 정부에서 지목하는 카르텔 교수가 아니라 카르텔과 상관없는 대학원생에게 집중된다. 게다가 부모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대학원생이 첫 번째 피해자가 된다. 현재 지원받고 있는 과제는 내년 초에 종결된다. 요즘 고민이 많다. 나보다 의욕적이고 혁신적인 젊은 교수의 연구과제가 지원받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닐지, 그렇다면 이제 연구를 그만둘 시점이 마침내 내게 온 것이 아닐까 매일 고민한다. 연구비 수주의 전망이 어두워,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이었던 학생에게는 다른 그룹으로 진학하는 것이 좋겠다고 알렸다. 교수들은 대학원생 받는 것을 이미 주저하기 시작했고, 정부 출연 연구소에서도 내년 비정규직 연구원 채용 규모를 이미 줄이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예산 삭감의 피해는 대학원 진학을 꿈꾸던 학부생, 현 대학원생, 그리고 비정규직 연구원에게 집중된다. 연구비 삭감으로 과학자를 꿈꾸는 젊은 연구자가 줄어들면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에 큰 장애가 생기고 결국 큰 피해는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 국민 모두에게 돌아올 게 분명하다. “계속 과학을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큰 욕심도 없이 과학을 그냥 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이 계속 그 길을 걷도록 도와주는 것이 정말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일일까? 그동안 연구를 재밌게 하면서 정말 행복했고, 하루하루 발전하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큰 보람도 느꼈다. 딱히 세상에 어떤 경제적 도움이 될지 알 수 없고, 노벨상을 받을 리도 없는 부끄러운 연구를 20여년 지원해 주신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린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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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3-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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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2023.08.16]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과학은 또 이렇게 한 걸음을 이어간다
- 경향신문 2023년 8월 16일에 실린 기사 발췌 출처: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8162016015 상온상압 초전도체 주장이 최근 큰 관심을 끌었다. 여러 그룹에서 시료를 제작해 실험하기도 했다. 현재 초전도체가 아닌 것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과학자로 살다보면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놀라운 결과가 큰 관심을 끌면, 여러 연구그룹이 재현실험을 시도하고, 설명하는 이론을 제안하기도 한다. 전에 들은 농담이다. 이론물리학자는 자기 이론만 믿고, 실험물리학자는 심지어 자기 실험도 믿지 않는다는 농담이다. 농담이지만 학계에 만연한 건강한 회의(懷疑)의 풍토를 어느 정도 담고 있다. 과학자는 늘 의심하는 것이 뼛속 깊이 자리 잡은 사람들이다. 긴 세월 회의와 검증의 시간을 꿋꿋이 견딘 것들이 모여 과학의 토대가 되고, 튼튼한 바닥이 최근의 논문을 의심하는 근거로 작동한다. 방금 출판된 결과를 진실이라 믿는 과학자는 거의 없어서, “재밌군.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겠어” 정도로 받아들인다. 검토와 회의, 비판과 재현의 과정이 이어지면서, 처음 결과가 굳건한 사실로 학계에 받아들여져 토대에 편입되기도 하고, 회의의 체에 걸러져 과학의 뒤안길로 사라지기도 한다. 튼튼한 과학의 나무는 회의를 양분 삼아 조금씩 천천히 자란다. 과학자도 사람이어서 실수할 수 있다. 하지만 충실하고 솔직하게 결과를 보고했다면, 딱히 책임을 묻지는 않는다. 물론, 고의로 결과를 조작하거나 하지 않은 실험을 한 것처럼 속인 논문은 다른 문제다. 학계의 신뢰를 크게 잃어 이 연구자의 이후 연구는 학계의 주목을 받기 어려워져, 학계에서 방출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이처럼 작동하는 자정의 힘은 상당히 크다. 누가 면밀히 조사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도 대부분 과학자는 논문에 거짓을 담지 않아서, 다른 이의 논문을 일단 믿고 보는 것이 가능한 문화가 정착되었다. 고의적인 조작은 상호신뢰의 관행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나쁜 부정행위다. “다들 일단 믿어줄 테니 데이터를 좀 바꾼들 누가 알까”의 마음이 학계에 널리 퍼지게 되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아무도 믿지 못하면 과학은 없다. 연구결과는 주로 동료 평가를 거친 논문으로 공개된다. 논문이 투고되면 학술지 편집자는 같은 분야의 과학자를 두세 명 선정해 심사를 맡긴다. 트집 잡을 것이 없어 출판이 단박에 결정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익명의 심사자와 논문 투고자 사이에 비평과 답변이 오가며 논의가 보강되고 결과가 충실해지는 과정을 거친다. 심사를 통과해 출판되었다고 해서, 모든 과학자가 논문의 내용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정식 출판된 논문 중에도 가치가 없는 것이 많고, 후속 연구로 논문이 틀린 것으로 밝혀지는 일도 제법 발생한다. 심사를 거쳐 출판되었다는 것은, 논문이 학계에 공개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을 만족했다는 정도의 의미다. 연구의 가치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이후에 이루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학회와 논문에서 자주 언급하고 인용하며, 논문에 기대어 많은 후속연구가 이어지면서, 같은 분야의 연구자들 사이에는 중요한 논문과 훌륭한 연구자에 대한 암묵적인 합의가 형성된다. 논문이 출판되기까지는 짧아도 몇달 정도가 걸린다. 공개 시점을 훌쩍 앞당기는 방법이 있다. 바로, 이번의 초전도 논문 같은 경우다. 동료 평가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볼 수 있게 출판 전 온라인에 공개되는 논문을 프리프린트(preprint)라고 한다. 물리학 분야의 프리프린트는 주로 아카이브(arXiv)에 공개된다. 출판 이후에 논문을 아카이브에 올리는 학자도, 논문을 전혀 올리지 않는 학자도 많다. 또, 투고 전 학계의 반응을 미리 살펴 정식 투고 논문을 더 충실하게 하기 위해 프리프린트를 미리 공개하는 학자도 많다. 완결된 것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마무리된 결과를 모아 프리프린트를 아카이브에 올리는 것은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이번 상온상압 초전도 프리프린트도, 다른 저자의 동의 등 다른 문제가 없다면, 아카이브에 먼저 공개한 것을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완성도가 아쉽다는 의견도 있지만, 아카이브는 원래 그런 논문도 올릴 수 있는 곳이다. 물론, 대다수 연구자는 프리프린트에도 정성을 기울인다. 엉성한 논문을 섣불리 공개하면 본인의 평판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의 프리프린트는 완성도의 문제도 있지만, 초전도체라면 꼭 보여야 하는 특성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의견으로 보인다. 어떻게 결론이 나든, 과학은 또 이렇게 한 걸음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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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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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2023.07.20]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다양한 자연현상, 동일한 자연법칙서 비롯한다
- 경향신문 2023년 7월 20일에 실린 기사 발췌 출처: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7200300015 “딱 하나로 정해진 중력법칙을 따라 행성 지구가 태양 주위를 오랜 시간 공전하는 동안, 정말 단순한 시작에서부터 이토록 아름답고 경이로운 온갖 다양한 형태의 생명이 진화했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다윈의 <종의 기원>에는 이렇게 내가 옮겨 본 유명한 마지막 부분이 있다. 어쩔 수 없는 물리학자인 나는, 고정된 중력법칙과 생명의 다양성이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다윈의 통찰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현상의 다양성은 자연법칙의 단순한 동일성과 함께한다. 같아도 다를 수 있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같지만 다른 예가 많다. 풀잎 위 빗방울은 둥근 구슬로 구르고, 쏟은 물은 바닥에 넓게 퍼진다. 크고 작은 물 덩이의 다른 모습은 물리학의 에너지가 정한다. 작은 빗방울의 모습은 중력이 아닌 전기력이 정한다. 표면적이 작을수록 에너지가 더 낮아 빗방울은 둥글게 뭉쳐 구른다. 커다란 물 덩이의 모습은 전기력이 아닌 중력이 정한다. 지면에 가까울수록 에너지가 더 낮아 쏟은 물은 납작 엎드려 바닥에 퍼진다. 정확히 같은 전기력, 정확히 같은 중력이 작용해도 물 덩이의 크기에 따라 다른 모습이 된다. 똑같은 물리학이 물 덩이의 다른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똑같은 진화의 법칙이 작용해도 실로 다양한 생명이 만들어진다. 다양한 자연현상이 동일한 자연법칙에서 비롯한다. 생물학의 유전적 부동의 부동(浮動)은 부동산의 부동(不動)이 아니다. 시냇물 위 나뭇잎이 둥둥 떠(浮) 휘휘 움직이는(動) 것처럼, 집단 내 유전자의 빈도가 변하는 것이 유전적 부동이다. 생존에 유리한 형질을 표현하는 유전자가 선택되는 것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다. 유전적 부동은 다르다. 생존 가능성에 차이가 없어도 유전자 빈도의 시간 변화를 만들어낸다. 흰 돌, 검은 돌, 색깔만 다른 바둑알이 각각 10개씩 담긴 주머니를 생각해보자. 바둑알 하나를 마구잡이로 꺼내, 같은 색 하나를 보태 두 개를 다른 빈 주머니에 넣자. 이 과정을 10번 반복해 바둑알 20개가 담긴 두 번째 주머니를 채우자. 이를 또 여러 번 되풀이해 세 번째, 네 번째 주머니로 이어가보자. 마지막 주머니의 속사정은 어떨까? 눈 질끈 감고 하나를 꺼내 같은 색 둘을 다음 주머니에 담는 과정은, 우연에 의해 선택된 개체가 다음 세대에 두 개체의 자식을 낳는 과정에 해당한다. 이때, 희고 검은 색에는 생존과 생식 확률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어쩌다 우연히 주머니에서 흰 바둑알이 검은 바둑알보다 손에 몇 번 더 잡혔다면, 다음 세대 주머니에는 흰 바둑알이 더 많아진다. 최종 주머니에는 흰색만 가득 들어 있을 수도 있다. 색에 따른 생존 확률의 차이가 없어도, 유전적 부동이 집단 내 유전자 빈도의 시간 변화로 이어져 진화를 만들어낸 셈이다. 자연선택은 다르다. 아무 바둑알 하나를 눈 질끈 감고 고르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만약 흰색이면 바둑알 하나만, 검은색이면 두 개를 두 번째 주머니에 담는 실험을 생각해보자. 여러 번 이어가면, 결국 검은색 바둑알만 가득한 주머니가 등장한다. 희고 검은 차이에 따라 자손의 개체 수가 달라지는 자연선택의 원리다. 자연선택과 유전적 부동은 집단 내 유전자의 빈도 변화를 마찬가지로 만들어내지만, 유전적 부동은 표현형의 차이에 눈감는 중립선택이다. 유전적 부동이 생물 종을 멸종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어쩌다 등장한 흰색만 담긴 주머니가 검은색만 생존할 수 있는 새로운 환경에 놓이는 경우다. 이때 다음 세대는 바둑알이 멸종해 텅텅 빈 주머니가 된다. 유전적 부동은 집단의 크기가 작을 때 강해진다. 바둑알 100만개로 같은 실험을 진행하면, 한 색깔이 주머니를 가득 채우는 상황을 보기 어렵다. 같은 것을 다르게 보는 물리학자의 눈에, 유전적 부동은 크기가 작을 때 드러나는 물리학의 유한 크기 효과(finite-size effect)다. 또, 한 색깔이 주머니를 가득 채우면 이후에는 아무런 변화 없이 같은 속사정을 가진 주머니가 계속 이어지는 생물학의 유전적 고정(genetic fixation)은, 한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는 통계물리학의 흡수상태(absorbing state)다. 유전적 부동이 일으키는 유전적 고정을 생물학이 말할 때, 물리학은 유한 크기 효과가 일으키는 흡수상태를 본다. 물리학과 생물학은 같은 자연을 바라보는 결 다른 시선이다. 같아도 다르고, 달라도 같은 것이 자연과 과학의 참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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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3-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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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2023.06.22]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로또, 투자가 아닌 단순 확률게임
- 경향신문 2023년 6월 22일에 실린 기사 발췌 출처: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6220300015 우리나라 로또는 45개의 숫자 중 6개를 맞힌 사람이 1등에 당첨되는 방식이다. 지난주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은 모두 12명이었고 각자 22억원의 상금을 받게 되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정말 부럽다. 로또 한 장을 사면서 우리는 희망도 함께 산다. 당첨되면 부모님께 아파트를 사드릴지, 차를 바꿀지, 행복한 고민을 며칠 이어 할 수 있다. 그렇다면, 1등 당첨확률은 얼마나 될까?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1등 당첨확률을 알려면 전체 가능한 가짓수를 계산해야 한다. 먼저, 첫 번째 숫자에는 모두 45개의 가짓수가 있다. 앞에 나온 숫자가 다시 나올 수는 없어서 두 번째에는 44개의 가짓수, 세 번째에는 43개의 가짓수가 있다. 이 가짓수를 차례로 여섯 번 곱한 45×44×43×42×41×40을 계산하면 60억 정도가 된다. 6개 번호의 순서가 뒤바뀌어도 여전히 당첨번호라는 것을 고려해 이 값을 보정하면, 로또 1등 당첨확률은 약 800만분의 1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매주 1억장 이상의 로또가 판매되니 지난주 1등 당첨자 수 12명은 예상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당첨확률이 아무리 작아도 많이 팔리면 누군가가 당첨된다. 그 누군가가 내가 될 가능성이 거의 없을 뿐이다. 당첨을 크게 기대하지 마시라. 지금까지의 당첨번호를 모아서 살펴보면 어떤 번호가 다른 번호보다 더 자주, 혹은 더 드물게 관찰된다. 하지만 더 자주 나왔던 번호라고 해서 다음주에 당첨될 확률이 더 높은 것은 아니다. 번호별 당첨횟수의 차이를 통계학의 방법으로 살펴보니, 6개 번호가 독립적으로 마구잡이로 결정된다는 가설을 기각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결과가 얻어졌다. 당첨번호 예측은 불가능하다. 정말로 당첨번호를 높은 확률로 미리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분이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어 유료 회원을 모집할지, 아니면 자신이 예상한 번호로 로또를 단돈 1000원에 구매해 수십억원을 벌지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이런 사이트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당첨번호는 무작위로 정해져도 1등 당첨자 수는 큰 폭으로 변할 수 있다. 자기가 원하는 숫자 6개를 직접 골라 적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1, 2, 3, 4, 5, 6을 손으로 직접 적어낸 구매자가 1만명이어서 지난주 당첨번호인 16, 18, 20, 23, 32, 43을 적어낸 구매자 12명보다 훨씬 더 많다면 어떨까? 두 경우 모두 정확히 같은 800만분의 1정도의 확률로 1등에 당첨되지만, 정말로 다음주에 1, 2, 3, 4, 5, 6이 당첨되면 1등 당첨자는 기껏해야 300만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금을 받게 된다. 실제로 이렇게 6개의 번호를 순서대로 적거나, 용지의 세로 방향으로 나란히 6개의 숫자를 적어내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다음에 로또를 구매할 때는 사람들이 고르지 않을 것 같은 번호를 고르거나, 어떤 번호를 고를지 고민이라면 무작위로 자동 생성하는 것이 더 낫다. 당첨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당첨될 때 받게 되는 상금의 측면에서는 그나마 나은 방법이다. 1등 당첨이 많이 나온다는 로또 명당 판매점도 허상이다. 1등 당첨자가 어쩌다 여러 번 나온 판매점이 있으면, 이후에는 명당으로 소문이 나서 더 많은 로또가 팔리고, 결국 다음에 또 당첨자가 나올 확률이 더 커진다. 소문일 뿐이어도 정말로 로또 명당이 된다. 하지만 굳이 그곳에서 로또를 산다고 해서 내가 산 로또가 당첨될 확률이 큰 것은 아니다. 아무 판매점에서나 로또를 구매해도 내가 1등에 당첨될 확률은 어디서나 같다. 로또는 투자가 아니라는 것을 꼭 강조하고 싶다. 10년 동안 매주 로또를 여러 장 구매한 사람이든, 오늘 로또 한 장을 처음 구매한 사람이든, 이번주 1등 당첨확률은 정확히 같다. 로또는 투자가 아니며, 매번 독립적으로 6개의 번호가 마구잡이로 결정되는 단순한 확률게임이다.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들을 살핀 연구에 따르면 당첨의 행복감은 2년을 넘지 못한다. 오히려 갑자기 큰돈이 생기면, 그로 인해 바뀐 소득 기준의 상향 변화로 당첨 이후에는 평범한 한 달 월급이 하찮게 느껴지게 된다. 웬만한 수입에는 행복감을 느끼기 어려워지게 된다. 부담이 될 정도로 큰돈을 로또 구매에 쓰지는 마시라. 로또 한 장을 살 때 우리가 구매하는 것은, 수십억원을 기대하며 누리는 며칠 동안의 소소한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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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3-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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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2023.05.25]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물은 ‘창발’로 흐르고, 삶은 ‘창발’로 이어진다
- 경향신문 2023년 5월 25일에 실린 기사 발췌 출처: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5250300005 우리 몸을 구성성분으로 나누고 또 나누면 결국 원자에 닿는다. 살아 있지 않은 원자들이 모여 살아 있음을 이룬다. 이처럼 구성요소가 갖고 있지 않은 속성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수많은 요소로 이루어진 전체가 새롭게 보여줄 때, 이를 ‘창발’이라고 한다. 마치 지평선 아래에 있던 해가 떠올라 어느 순간 갑자기 보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미시적인 세상에서 볼 수 없던 것이 거시적 규모에서 새로이 드러난다는 의미로 ‘떠오름’이라고도 한다. 생명은 생명 없는 원자로부터 떠오른다. 생명뿐 아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대부분은 창발의 결과다. 액체인 물이나 고체인 얼음이나 같은 물 분자로 이루어지지만, 수많은 분자가 특정한 방식으로 연결되면 흐르는 물이 되고 딱딱한 얼음이 된다. 물은 창발로 흐르고 삶은 창발로 이어진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나의 뇌는 1000억개의 신경세포가 수백조개의 시냅스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놀라운 물질이다. 이 글을 쓸 때 일어나는 나의 생각을 현미경 속 신경세포에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물질 없이 창발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창발은 물론 신비로운 현상이지만 기본적인 자연법칙을 위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 분자가 없다면 물의 흐름도 없고, 뇌가 없다면 생각도 없다. 다양한 거대언어모형 인공지능이 보여주는 최근의 눈부신 발전도 창발의 결과다. 인간 뇌의 시냅스 숫자인 수백조개에 이른 것은 아니지만 이미 OpenAI가 만든 챗GPT는 수천억개의 조절변수를 가지고 있다. 조절변수의 수가 늘어나면서 어느덧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운 놀라운 창의적인 결과물을 생성하는 인공지능이 창발했다. 양적인 팽창이 질적인 도약을 이룬 셈이다. 뇌의 신경세포는 1초에 기껏 1000번 상태를 바꿀 수 있지만, 인간의 뇌가 모여 함께 만든 컴퓨터 CPU는 1초에 무려 수십억번 정보를 처리한다. 또, 컴퓨터 소자 사이의 정보 전달 속도와 비교하면 신경세포 사이의 정보 전달은 시속 160㎞ 정도에 불과해 거북이걸음처럼 느리다. 인간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의 구현은 수백조개보다 훨씬 적은 수의 조절변수로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절변수의 수를 무작정 늘린다고 인간과 동등한 결과물을 인공지능이 생성해낼 수 있는 것은 아직 아니다. 우리 인간의 사고와 언어에는 독특한 구석이 많기 때문이다. “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라는 속담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수염 석 자’가 어떤 문화적·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서, 멋진 수염을 기르고 있는 도도한 양반이라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뜻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다면, 양반이 살아남으려면 석 자 길이의 수염이라도 먹어야 한다는 뜻으로 엉뚱하게 오해할 수도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문화적·역사적·사회적 상식을 인공지능이 습득하려면 지금과는 다른 작동방식이 필요하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이 있다. 우리 인간은 습득한 지식에 기반해 스스로 몸을 움직이고 이에 대한 외부 세상의 반응을 다시 또 지식의 습득에 활용하는 방식으로 예측과 학습을 재귀적으로 이어간다. 외부와의 상호작용과 경험을 통해 스스로 학습을 이어가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가 이미 진행되고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 마치 어린아이처럼 스스로 예측을 생성하고 외부 세계와 직접 연결해 재귀적으로 학습을 이어가며 스스로 발전하는 방식의 인공지능도 우리 곁에 올 것으로 보인다. 아직은 어렴풋한 여명이지만, 인류가 한 번도 못 보던 새로운 해가 지평선 너머로 떠오르고 있다. 거대인공지능이 떠올라 새롭게 보여줄 그 빛이, 우리를 비출 고맙고 따스한 햇볕이 될지, 우리를 고통에 몰아넣을 디스토피아의 세상을 보여줄지, 기대와 우려를 함께 가지고 여명을 바라본다. 인공지능 개발은 과학자와 공학자의 몫이더라도, 인공지능으로 도래할 세상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 모두여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어지는 게 과학자의 어쩔 수 없는 속성이지만, 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허락하는 것은 우리를 재앙으로 이끌 수도 있다. 어떤 미래를 우리가 원하는지 지금 묻고 미리 대비하지 않는다면, 갑자기 떠오를 세상은 어느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모습일 수 있다. 인공지능이 창발할 세상에 대비하려면 우리 모두가 함께하는 지성의 창발이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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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3-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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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2023.04.27]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생명의 장엄함을 보며 떠올린, ‘변이’의 힘
- 경향신문 2023년 4월 27일에 실린 기사 발췌 출처: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4270300015 진화론을 ‘유전적 변이의 차별적 선택’으로 줄여 말할 수 있다. 변이를 가져 부모와 다른 자식 중 일부는 성공적으로 생존하여 같은 변이를 가진 손자손녀들을 만들어낸다. 살아남은 개체만 다음 세대의 후손을 남기니 무척 당연한 얘기다. 유전되지 않는 변이는 진화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으니, ‘변이’ 앞 ‘유전적’도 중요하다. 다윈 진화론의 얼개를 이해하고 나면 이처럼 자명한 진실이 발견될 때까지 그처럼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 오히려 더 신기하게 느껴진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진화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려면 변이는 필수다. 변이가 전혀 없어 똑같은 후손들만이 태어나는 생물종은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로 멸종할 수도 있다. 따라서 변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생물종이 변화하는 환경에서 생존할 가능성이 더 크게 된다. 하지만 변이의 확률이 너무 커도 문제다. 우연적 변이 대부분은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낳아도 어차피 생존하기 어려운 자손을 소중한 생물학적 자원을 동원해 과도하게 만들어내는 비효율이 발생한다. 유전적 변이의 확률이 너무 작으면 멸종으로 이어지고, 확률이 너무 크면 낭비가 발생한다. 변이는 진화의 분명한 원인이자 자명한 결과다. 자식 하나의 크기가 아주 작아서 별 어려움 없이 수많은 자식세대 개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종은 높은 변이 확률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1000마리 자식 가운데 딱 10마리만 생존을 해도, 후손들도 같은 방식으로 대를 이어가면 몇 세대만 지나도 엄청난 숫자가 된다. 높은 변이 확률은 고위험 분산투자를 닮았다. 대부분의 투자는 쫄딱 망해 아무런 수익이 없지만, 극히 일부의 투자가 성공을 하면 엄청난 수익으로 돌아오는 셈이다. 나와 다른 유전형을 가진 자손을 변이로 만들어내고 이 중 성공적인 변이를 가진 자손이 대를 이어가는 진화의 메커니즘 자체도 이처럼 진화가 만들어낸 것이다. 진화의 메커니즘을 따르지 않는 생명체는 진화를 통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없으니, 진화가 진화를 스스로 만들어낸 셈이다. 우주에 우리 아닌 다른 생명이 과연 존재하는지는 여전히 오리, 아니 오광년(光年)무중이지만, 생명이 있는 모든 곳에서는 진화의 메커니즘이 자연 발생할 수밖에 없다. 물리학은 우주적 규모의 자연법칙의 보편성을, 생물학은 우주적 규모의 진화의 보편성을 말한다. 우주 어디서나 같은 빛의 속도와 생명의 진화를 스스로 발견해낸 우리 인류는 드디어 우주적 규모의 물리학 학회와 생물학 학회에 참석할 자격을 얻었다고나 할까. 자연에서 진화를 배운 인간은 이를 과학에 이용하기도 한다. 유전 알고리즘이라고 불리는 재밌는 방법도 있다. 인터넷에서 ‘유전 알고리즘 그네타기’로 검색해 볼 수 있는 동영상이 있다. 마구잡이로 움직여 그네를 잘 타지 못하는 개체들로 0세대 집단을 구성하고, 조금이라도 더 잘 타는 개체들만으로 다음 세대를 생성한다. 자식 세대의 개체를 생성할 때, 유성 생식하는 현실 생명처럼 유전자의 변이와 조합도 허락한다. 이러한 유전 알고리즘을 따라 여러 세대가 이어지면, 그네를 몹시 잘 타는 개체들이 자연스럽게 출현하게 된다. 어떻게 그네를 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고리즘으로 구현된 진화의 힘만으로 그네를 잘 타는 인공 개체들이 결국 생성된다. 진화는 놀라운 시계를 만들어내는 인간 시계 장인을 닮았지만, 다른 점도 많다. 눈이 멀어 엉뚱한 조합으로 수없이 많은, 작동하지 못하는 시계를 만들어내지만, 엄청나게 긴 시간이 허락되어 있다는 점이다. 진화는 엄청나게 긴 시간을 수명으로 가진 눈먼 시계공이다. 동양 고전 <대학>에 은나라 탕왕이 매일 스스로 다짐했던 글귀가 나온다. 바로,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苟日新 日日新 又日新)”이다. 하루하루 새롭게 하는 것을 재귀적으로 다시 반복하는 것은 모든 생명이 계속 이어가는 진화의 모습이기도 하다. 진화가 만들어낸 온갖 생명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보며 변이의 힘을 떠올린다. 우리 모두는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곳으로 숨 가쁘게 달려갔던 선조들의 후예다. 4월 중순에 피어 꽃말이 ‘중간고사’라고 농담했던 벚꽃은 올해는 3월 말에 피었다. 때 이른 개화를 보며 환경의 변화를 절감한다. 환경이 변하면 우리 삶의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기나긴 세월 우리 인간을 만들어낸 진화의 과정에서 스스로를 바꾸지 않으면서 생존의 헛된 꿈을 꾼 생명은 없다. 삶의 방식의 변화는 미래의 여전한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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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3-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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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2023.03.30]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물리학의 다음과 ‘다음 소희’는 지금이 정한다
- 경향신문 2023년 3월 30일에 실린 기사 발췌 출처: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3300300005 길에서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잠깐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자니 아쉬워 친구가 다음에 밥 한번 같이 먹자고 말한다. ‘다음’이 정확히 언제냐고 묻지는 말자. 갑자기 말 더듬으며 당황하는 친구 얼굴을 보게 될 테니. 그냥 “그래, 다음에 보자”가 적당하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우리는 시간의 순서로 일어나는 사건 중 현재를 기준으로 미래의 정해지지 않은 시점을 ‘다음’이라 할 때가 많다. 다음은 언제가 아니다. 다음은 시간의 화살을 따라 늘 미래를 향한다. 그 순간이 오기 전에 먼저(pre-) 말하는(dict) 것이 예측(predict)이어서, 물리학은 다음을 지금 말하는 예측에 관심이 많다. 고전역학에서 지금 이 순간의 물체 위치와 속도를 알면 다음 순간의 물체 위치와 속도는 딱 하나로 정해진다. 지금의 상태가 다음의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양자역학도 마찬가지다. 다음의 상태는 결정론적으로 지금 정해지지만 주어진 양자 상태에 대한 측정과 관찰의 결과가 확률로 주어질 뿐이다. 물리학의 다음은 지금이 정한다. 뉴턴의 고전역학에서는 물체에 주어지는 지금의 힘이 지금의 가속도(加速度)를 결정한다. 지금의 가속도를 알면 다음의 속도를 알고, 지금의 속도를 알면 다음의 위치를 안다. 지금으로부터 바로 다음을 알아내는 과정을 시간 축을 따라 한 단계 한 단계 조금씩 계속 이어가면 아무리 먼 미래라도 지금 예측할 수 있게 된다. 고전역학으로 이해하는 운동 중 가장 간단한 것이 물체에 작용하는 힘이 없는 경우다. 힘이 없으면 가속도가 없고, 가속도가 0이면 속도(速度)에 더해지는(加) 것이 없어 다음의 속도는 지금의 속도와 같다. 물체는 지금의 속도와 정확히 같은(等) 속도로 계속 움직이는 등속(等速) 운동을 하게 된다. 물리학에서 속도는 종이 위에 연필로 그린 화살표처럼 방향과 크기를 함께 갖는 벡터다. 등속으로 운동해 속도가 늘 같다는 말은 물체가 움직이는 빠르기뿐 아니라 움직이는 방향도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등속 운동을 하는 물체는 늘 속도가 같아서 시간이 지나도 늘 같은 빠르기로, 그리고 늘 같은 방향인 직선을 따라 움직인다. 힘이 없다면 다음은 지금과 늘 같다. 고전역학의 다음을 지금과 다르게 하는 것이 물체에 작용하는 힘이다. 가벼운 물체의 다음 경로를 바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질량이 작은 물체는 약한 힘에도 크게 반응해 커다란 가속도를 만들어 속도를 크게 바꾸고 미래의 위치도 크게 달라진다. 하지만 질량이 커 관성도 큰 물체는 지금과 다른 다음을 위해서 큰 힘이 필요하다. 물리학뿐 아니다. 사회와 시대에도 관성이 있다. “원래 늘 그랬던 것인데 뭘 유난하게”의 마음가짐이 사회의 관성을 유지하는 원동력이다. 세상에 “원래 그랬던 것이어서 다음에도 늘 그럴 것”은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경험하고 목격했던 학교에서의 체벌은 이제 먼 과거의 얘기고, 도대체 여자가 무슨 법대를 가고 의대를 가냐는 그릇된 생각도 이제 거의 사라졌다. 절대로 바뀔 수 없는 것은 세상에 없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눈 질끈 감으면 다음은 지금과 같아서, 다음을 바꾸려면 지금 바꿔야 한다. 정주리 감독의 영화 <다음 소희>를 인상 깊게 관람했다. 최준영 작가의 인문학공동체 수원 ‘책고집’에서 열린 감독과의 대화시간에도 참석했다. <다음 소희>는 현장실습을 나간 한 특성화고 학생 소희의 이야기다. 소희의 안타까움에 관객이 절절히 공감할 수 있는 영화지만, 영화 속 여러 가해자는 다른 의미에서는 피해자이기도 하다. 소희의 자살 이전 자취를 따라 범인(犯人)을 쫓는 형사가 결국 마주친 이들은 숱한 범인(凡人)이었다. 엄청난 관성을 가진 거대한 사회 구조는 가해자가 다시 피해자가 되는 계층구조의 연쇄 사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사슬의 가장 끝단에 소희가 있었다. 영화 제목 <다음 소희>는, 세상에 둘도 없는 유일한 존재인 소희의 안타까운 죽음 뒤에도 이어질 다음 소희를 일반명사로 말한다. 힘이 존재해야 지금과 다른 다음이 만들어지는 물리학을 떠올리며, 모두의 힘이 함께 모여 달라질, 다음 소희가 사라진 소희 다음을 소망한다. ‘다음에도’를 ‘다음에는’으로, 그리고 ‘결코 다시는’으로 바꾸는 것은 여럿의 부릅뜬 눈이다. 세월호·이태원 참사를 겪고 <다음 소희>를 보면서 ‘결코 다시는’을 애써 떠올린다. 다음에는 달라질 것이라 누가 말하면 다음이 도대체 언제냐고 따져 물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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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3-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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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 물리학과 한정훈 교수, <물질의 재발견> 출판
- 금속, 자석, 유리처럼 너무나 흔하고 평범한 물질에서부터 많이 들어봤지만 설명하기는 어려운 반도체와 부도체,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물리학의 두 난제 초전도체와 암흑물질까지, 11가지 물질을 통해 물리학의 최전선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각 분야 국내 최고의 물리학자 11명이 뜻을 모아 물질 발견과 발명의 역사, 그리고 최첨단 물질물리학과 산업의 이모저모를 들려준다. 과학의 역사는 같은 이름 아래 다른 모습으로 재발견된 물질의 사례로 넘쳐난다. 이 책에 담긴 그 사례들과 저자 자신들의 연구 이야기를 읽으며 독자는 ‘물질’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물리학자들은 실제로 어떻게 연구하는지, 좋은 질문이란 어떤 것인지, 남아 있는 질문들은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도 엿볼 수 있다. 물질물리학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은 물론 현대 물질세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물질’에 대한 교양을 쌓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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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3-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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