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dlines] 총원우회 풍류기행 '엄홍길 대장과 함께 한 백두산 기행' 기행문(4) - 이창길 GB세미나 회장님(10기, 한국보험경영연구소 대표)
- 성균인문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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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8-31

〔제4화〕
<짧지만 긴 여정, 뿌리를 찾아서>
만주에 펼쳐진 한민족의 기상을 새기며 이번 여행의 또 하나의 의미있는 일정 중의 하나는
연길 및 용정과 두만강변의 북한⬝중국 국경지대의 방문이었다.
연길(延吉, 옌지)시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중심도시로 인구는 약 64만 명이다.
동쪽으로는 도문시, 남쪽으로는 용정시와 접해 있다.
연길시의 시화(市花)는 진달래, 시목(市木)은 수양버들이라고 한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꽃과 나무인지라 흥미롭다. 조선족이 58%를 차지하고 있고,
서비스업의 비중이 약 90% 이상으로 특히 백두산 탐방객을 겨냥한 관광산업이 활발하다고 한다.
첫날 장춘에서 고속열차를 이용하여 장백산역까지 이동했는데, 차창밖으로는 옥수수밭이 끝없이 이어졌다.
지금의 요녕성, 길림성으로부터 흑룡강성에 이르는 드넓은 영역을 무대로 중국이라는 거대세력에 맞서 고유한 정체성을 굳건히 지켜온 고조선, 부여, 옥저, 고구려, 발해국의 역사를 짚어보면서,
우리민족의 강인하고도 진취적인 민족기상을 떠올려 보았다.
일제강점기까지 ‘만주’라고 불렸던 현재 중국의 동북 3성 지역은 원래 한민족의 터전이었고,
일제강점기간 중에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무력항쟁의 전진기지로서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조선조 숙종 38년(1712년) 청나라의 제의에 의해 백두산 변계를 조사하고,
백두산의 분수령인 높이 2,150m의 지점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는데,
여기에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西爲鴨綠 東爲土門)’이라는 내용이 각서되어 있었다.
조선 후반기에 이르러 정계비의 위치상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쑹화강(松花江)의 한 지류’이므로
이른바 간도일대가 조선의 영토임을 계속하여 주장해 왔다.
그러나 청의 위세때문에 관철되지 못하다가, 1909년 일제가 남만철도의 안봉선(安奉線) 부설문제로 청과 흥정하여
철도부설권을 취하는 대가로 간도지방을 청에 넘겨줌으로써
현재 기준으로 이 일대에 우리 동포 180만 명이나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영토는 한반도로 후퇴, 축소되고 만 것이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삶의 터전을 일구었던 고조선 이래 4,500년의 역사를 회상하니 자꾸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다.

<용정, 윤동주 시인의 자취를 찾아>
짧은 일정이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빠뜨릴 수 없는 곳이 용정이다.
일제의 압제를 피해 이곳에 뿌리를 내린 선조들이 낯선 땅에서도
우리의 말과 문화를 지키며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 조선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던
당시의 함성이 아직도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했다.
이곳 용정은 시인 윤동주의 성장배경과 연결되는 공간으로도 알려져 있어,
차창에 비친 해란강의 풍경과 직접 찾은 용두레 우물터는 색다른 감정으로 다가왔다.
멀고도 추운 낯선 땅, 북간도에서 태어나 조국의 독립을 보지도 못한 채
그토록 증오했던 일본 땅 감옥에서 미처 이십팔 년도 채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젊은 시인 윤동주.
나는 이 분을 떠올리면 자꾸 부끄러운 마음이 앞선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序詩) 전문-
우리가 용두레 우물터를 찾던 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다소 을씨년스런 날씨였다.
자신의 역할을 다한 채 박제가 되어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용두레와 우물.
그 앞에 ‘용정지명 기원지 우물(龍井地名起源之井泉)’이라고 새겨진 기념석만이
이곳이 예전에는 사람들로 북적였을 우물터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 때
뜻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 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본 2절은) 조두남 작사, ‘선구자’-
기념석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돌아서는데,
우물터 모퉁이에 우산도 없이 작은 좌판을 놓고 앉아있던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무엇에 끌린 듯 여인곁에 가만히 앉아 우산을 씌워주며 좌판위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윤동주 시인의 ‘서시(序詩)’가 적힌 냉장고에 붙이는 자석 굿즈였다.
우리 일행들은 이미 모두 버스로 이동한 뒤였다.
나는 물건이 무슨 소용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마치 그래야 하는 것처럼 좌판위에 있는 것 모두를 포장해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여인이 부른 가격의 두 배쯤에 해당하는 현금을 손에 쥐어주고 서둘러 일어섰다.
해란강을 지나는 차 안에서 여인의 선한 눈망울이 자꾸 눈에 밟혔다.

<두만강,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북한 땅>
중국쪽에서는 ‘도문’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두만강에서 그 명칭이 유래했으며,
두만강유역의 교통과 경제 요지로서 도문대교와 철교를 통해 북한과 중국간 물자교류가 오랜 기간 지속되어 왔다.
지리적으로는 북한의 온성군과 맞닿아 있어 두만강 건너 북한땅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실제로 강건너 흰 건물 외벽엔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사진이 걸려있고, 붉은 색 바탕에 선전구호가 보인다.
세상에! 이렇게 가까운 거리이건만 갈 수 없는 땅, 북한이 있다니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좁은 강위로 중국 관광보트가 무심하게 오가는 풍경이 낯설기만 했다.
<아버지에 대한 상념>
나의 부친은 함경북도 길주가 고향이시다. 이곳에서 태어나 중국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를 다니셨다.
이 학교는 원래 캐나다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한인학교였다고 한다.
그 뒤에 화북지역에서의 항일전쟁을 위해 편성된 중국팔로군에 입대하여 해방을 맞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이번에는 공산당에 맞서 지하투쟁을 하다가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남하하셨다.
실로 파란만장한 시대를 사신 것이다.
돌아가시기 몇년전에 대련에서 사업을 하고있는 막내아우의 안내로 용정과 도문을 방문하신 적이 있다.
그 때 은진학교며 사시던 곳을 두루 돌아보았다는데,
이곳 두만강변에 오셨다가 갑자기 사라져서 아우가 크게 당황했다는 얘기를 들은 바가 있다.
잠시 뒤에 아버지를 찾았는데,
그 때 아버지는 강변 계단에 주저앉아 고뇌에 찬 얼굴로 북한쪽을 바라보며 담배를 태우고 계셨더란다.
그 당시에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고향을 떠날 때 스물일곱 살.
어머니께 절한 뒤 총 한 자루 달랑 메고 헤어지면서,
길어야 한 달이면 다시 돌아오겠노라고 약속드린 게 마지막.
그것이 어머니와의 평생의 이별이 될 줄은 그 때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4형제 중 장남인 내게 고향 길주를 잊지 말아야 한다며 내 이름 끝자에 길(吉)자를 붙여주셨다.
내가 어릴적에 아버지는 자신의 고향산천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하도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나중에는 그곳이 마치 내가 살던 곳으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길주역에서 내려 펄프공장을 지나 뚝방길을 따라가면 나타나는 첫 번 째 마을,
그 입구에 들어서면......’ 그렇게 고향은 아버지에게 절절한 그리움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예전에 이곳에서 그러하셨듯이 두만강 물길에 나만의 감정을 실어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나마 두 손을 고이 모아 큰절을 올렸다.
나의 뿌리가 있는 곳을 향해.
버스에 올라 나는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멀지않은 장래에 가족들의 손을 잡고 이곳을 꼭 다시 한번 찾아야겠다고.
가족들에게 이 기막힌 역사의 아픔을 전해야 하는 게 나의 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에 놓친 서파코스를 통한 천지친견의 재도전은
이런 숙명적인 내 소망에 대한 양념과 같은 괜찮은 구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