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문초록
林泳(1649~1696)은 평생 학문 연마에 전념하고자 하는 뜻을 지닌 성리학자였지만, 科擧로 立身한 이상 出仕와 辭職 사이를 오갈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임영은 疏箚를 통해 辭職과 論事의 의견을 개진했다. 임영은 한때 숙종의 인정을 받으며 조정에 출사하여 經世의 이상을 시행하고자 했지만, 그 기대는 얼마 가지 못했다.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기는커녕 숙종의 감정적인 대응만이 돌아오는 상황을 몇 차례 겪은 임영은, 숙종의 求言에 따른 萬言疏에 경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총체적으로 담아 올렸다. 이에 대한 숙종의 반응마저 부정적이자 임영은 조정에 다시 나가지 않았고, 이후의 소차에서는 논사 없이 사직을 청하는 내용으로 일관했다.
본고는 소차의 작성 배경과 주제 구현 방식 및 소통 양상을 통해서 임영이 지녔던 경세의 견해를 종합적으로 살필 수 있었다. 그 내용은 聖學의 엄정한 기준으로 궁중 예산과 환관, 척신, 공신의 문제, 조세와 병역, 인사 제도와 국방 체제 등의 현안에 대해 내린 세부적인 진단과 대안들이다. 임영은 치밀한 단락 구성과 명확한 강령 부각, 그리고 억양법의 적절한 구사를 통해서, 爲民과 聖學의 정신을 당대의 구체적인 현안과 긴밀하게 연결하여 정연한 논리로 구축했다.
임영은 疏箚의 내용 선정에 신중했을 뿐 아니라 서술과 표현의 전략에도 관심이 높았다. 임영의 문학적 재능이 가장 지속적으로 순도 높게 발휘된 문체가 소차였다. 임영은 숙종의 감정적 반응을 몇 차례 겪은 뒤에도 오히려 강도 높은 내용의 소차를 작성했다. 과감하게 올린 소차의 주된 내용은 ‘爲民을 근간으로 하는 聖學의 經世 意識’이었다. 임영이 만언소에서 숙종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궁중의 경비 절감과 환관 배제 문제를 반복해서 강조한 것은, 민심을 얻기 위해 節用해야 하며 그 출발은 군주의 公心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聖學의 근본이 서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논의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뚜렷하게 드러낸 것이다. 임영의 소차는 그가 평생 엄격하게 매진한 학문의 일관된 표출이었으며, 출사와 관련하여 한 말과 보여준 행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주제어 : 林泳(1649~1696), 疏箚, 辭職, 論事, 萬言疏, 聖學, 經世